무대 위의 두 극단: 홍지윤이 증명한 ‘졌잘싸’의 품격, 그리고 파피(Poppy)가 구축한 서늘한 디스토피아
요즘 음악계는 장르의 경계가 무색할 만큼 치열한 퍼포먼스의 연속이다. 무대 위에서 오롯이 자신만의 서사를 증명해 내는 아티스트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건 언제나 흥미로운 일인데, 최근 전혀 다른 두 극단의 장르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들이 있다. 매주 피 말리는 경연 무대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부수고 있는 홍지윤, 그리고 새 앨범을 통해 또 한 번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심연을 파고든 파피(Poppy)가 그 주인공이다.
먼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국내 경연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MBN ‘현역가왕3’에 출연 중인 홍지윤의 기세가 매섭다. 대국민 응원 투표에서 4주 차에 이어 5주 차까지 내리 1위를 거머쥐며 3주 연속 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사실상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입지를 굳힌 셈이다. 특히 지난 3일 방송된 본선 3차전 1라운드 ‘마녀사냥2’에서의 1대 1 데스매치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무대였다. 상대가 무려 차지연이었으니 말이다. 정수라의 ‘내 사랑을 본 적이 있나요’를 선고받고 무대에 오르기 전, 홍지윤은 “차지연 선배님의 팬이라서 지목해 놓고 그날부터 맨날 후회 중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미친 하룻강아지가 되어보겠다”며 꽤나 도발적이면서도 솔직한 출사표를 던졌다.
그 결연한 다짐은 곧장 무대 위에서 증명됐다. 홍지윤은 특유의 맑고 청아한 고음으로 곡의 서정적인 도입부를 훌륭하게 세공해 냈고, 차지연의 폭발적인 성량에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화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단단한 가창력을 보여줬다. 미리 보는 결승전이라는 호평이 쏟아진 가운데, 원곡자인 정수라조차 “테크닉이 상당히 필요한 곡인데 기대 이상이었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본인 자리에서 할 만큼 다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아쉬움을 삼켰지만, 이 무대는 이른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의 완벽한 표본이었다. 홍지윤은 “차지연 언니와 무대를 꾸민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2라운드를 향한 굳은 다짐을 내비쳤다. 승패를 떠나 아티스트로서 한 뼘 더 성장한 순간이었다.
홍지윤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애절한 감성과 타격감 있는 보컬로 무대를 꽉 채웠다면, 바다 건너 파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수메리안 레코드(Sumerian Records)를 통해 발매된 새 앨범 ‘Empty Hands’의 수록곡 ‘Dying To Forget’ 뮤직비디오는 그녀가 구축한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디스토피아의 연장선에 있다. 좁고 어둑어둑한 복도에 실제 팬들로 구성된 군중을 욱여넣고, 그 한가운데서 날것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파피와 밴드의 핏빛 라이브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Guardian’, ‘Bruised Sky’, ‘Time Will Tell’ 등의 전작들에서 이미 완벽한 호흡을 맞췄던 오리 맥기니스(Orie McGuiness)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아 인더스트리얼 특유의 음울한 질감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번역해 냈다.
이번 뮤직비디오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화면 곳곳에 숨어있는 낯익은 얼굴들이다. 곡 작업에 직접 참여한 낙트 루즈(Knocked Loose)의 아이작 헤일과 하우스 오브 프로텍션(House Of Protection)의 스티븐 해리슨이 광기 어린 군중 속에 섞여 특유의 존재감을 발산한다.
신보를 통해 리스너들의 고막을 맹폭하고 있는 파피는 이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그대로 끌어안고 오는 9월 대대적인 영국 및 유럽 투어에 돌입한다. 투어 일정만 훑어봐도 그 행보의 스케일이 짐작된다. 9월 8일 리즈(First Direct Arena)를 짓밟고 시작해 10일 맨체스터(Co-op Live), 11일 버밍엄(Utilita Arena)을 거쳐 13일 런던 O2 아레나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압도적인 무대를 펼친다. 이후 전장(戰場)을 유럽 본토로 옮겨 16일 브뤼셀(Forest National)과 17일 파리(Accor Arena)를 찍고 독일로 향한다. 프랑크푸르트(19일, Congress Center), 도르트문트(20일, Westfalenhalle)를 거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22일, Ziggo Dome)을 휩쓴 그녀는 쉬지 않고 다시 함부르크(23일, Barclays Arena), 베를린(25일, Velodrom), 뮌헨(26일, Olympiahalle)의 아레나를 연달아 타격할 예정이다. 그리고 28일 이탈리아 카살레키오 디 레노(Unipol Arena)와 29일 스위스 취리히(Hallenstadion) 공연을 끝으로 지독하게 내달렸던 9월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하나는 트로트 경연의 룰 안에서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한국의 보컬리스트, 다른 하나는 메탈과 팝의 경계를 짓이기며 질주하는 록스타. 교집합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두 아티스트의 궤적이 묘하게 겹쳐 보이는 건, 결국 무대 위에서 자신을 남김없이 다 태워버리려는 그 맹렬하고도 지독한 집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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